2020. 2. 23.

북한산-왕의 성채 찰스 찰리-롱 POK-HAN, THE KING'S CITADEL. BY CHARLES CHAILLE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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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k Leslie's
 POPULAR MONTHLY
 VOL.XXVII.-January to June,1889.
  
NEW YORK:
 Frank Leslie's PUBLISHING HOUSE,
 110 FIFTH AVENUE.

 Chaillé-Long, Charles , 18421917, American soldier, African explorer, and writer.

Born at Princess Anne, Maryland. After serving in the Civil War, he was commissioned (1869) in the Egyptian army under General C. G. Gordon. Chaillé-Long explored the Victoria Nile and was awarded a medal by the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In 1875 he crossed the Congo-Nile divide to the Bahr al Ghazal region.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graduated from Columbia Law School, and became (188789) consul general and secretary to the legation in Korea.
  
His travel narratives in English include The Three Prophets (1884), My Life in Four Continents (1912), and Central Africa: Naked Truths of Naked People (1876). Among his writings in French are Les Sources du Nil (1891), L'Égypte et ses provinces perdues (1892), and La Corée ou Tschösen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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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ree ou Chosen",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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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rlingtoncemetery.net/charles-chaille-lo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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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왕의 성채 찰스 찰리-
  
POK-HAN, THE KING'S CITADEL. BY CHARLES CHAILLE LONG
  
서울은 마치 맑은 날 먼거리에서 바라보면 밝게 빛나며 각각 남북 방향으로 산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이 공중에 높이 솟은 거대한 성처럼 바라보이며 들쑥날쑥한 절벽과 날카로운 봉우리는 오히려 탑이나 연봉들이 머리위의 구름을 향해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는 북악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남-산 이름이 가르키듯이 북과 남쪽에 서 있는 산은 두 개의 커다란 산으로 그들의 선조부터 그리고 오백년동안 봉화불을 밝히면서 꺼지지 않고 조선 국민들에게 전쟁과 평화의 신호를 보내며 서 있다. 북쪽으로 그리고 북-(북악)의 뒤쪽은 매우 가파른 산들이 모여있고, 하나씩 서로 겹쳐서 누워있어 그 봉우리들이 마치 왕관 모습으로 형상화 되어 국왕의 퇴각지인 북-한 성곽을 이루어 침입할 수 없는 벽을 만든다.
  
-(북한산성), -(개성 송도), 문수산성 그리고 강와(강화)는 네 개의 커다란 산성이며 이태조에 의하여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태조는 1393년 현재 왕조의 창시자이며 전란에 대비하여 왕족이 피신할 수 있는 용도로 이것을 설계하였다. 태조는 군인으로서의 빛나는 명성에 힘입어 왕조를 세웠으며, 그의 본능적 영감은 왕조가 지속되어지게 하는 목적으로 이 산성을 쌓도록 자극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이 성채가 국가의 평화에 어떤 형식이던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성을 짓겠다는 기발한 생각도 그렇지만, 건설 과정 또한 그에 못지않게 색다른 시도였다, 수도 자체를 싸고 있는 성벽과 흡사한 모습이다. 방법은 간단하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즉 왕명으로 남자건 여자건 성을 오가면서 특정한 크기와 모양을 갖춘 돌들을 운반하여야 하였으며 이것을 성벽 줄에 따라서 배치하였다. 야생 동식물로만 가득했고 도성의 모습 따윈 찾아볼 수 없던 곳에 마치 요술을 부린 듯 산성과 성벽이 올라섰다. 산성 안에는 거대한 곡물창고가 지어졌으며, 그 안에 매년 거대한 양의 쌀을 비축하였다. 이것은 거의 관습이었고 이곳이 지어진 뒤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이 습관은 남아 있어서 지금도 오백년 전에나 유효하였을 무기들을 여기 병기고에 보관하며 녹슨 시간을 감싸안고 있으니, 필자 같은 애호가나 서방세계 박물관에는 진귀한 보물이나 다름없다. 지금처럼 당시에도 승려들만이 남아 산성에 세워진 초소를 지키며 고독하면서 평화로운 업무를 맡고 있다.반대로 국가는 그들 스님들에게 쌀 몇 가마씩을 지급하기도 하고 절을 보수해주기도 한다. 절들은 뛰어난 건축공법과 예술감각을 살려 지어졌다. 건설 당시는 한국에서 불교가 가장 융성하고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였다. 부식을 면치 못하는 절들이야말로 불교의 쇠락을 잘 보여준다.한국은 더 이상 불교국가가 아니다. 대신 광적인 조상숭배에 더해 하늘과 땅신을 섬기는 신앙 및 특히 용으로 형상화되는 산신령을 숭배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다.
  
서울은 커다란 7개 문으로 둘러쌓여 있고, -(북한산-앞으로 그냥 북한산으로 표기)13개 문이 있다. 확실히 그 문들은 아주 굉장히 크거나 아주 정교하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 방식대로의 아주 훌륭한 건축물이며 이 거대하고 놀라운 성벽의 아주 중요한 통로이자 대문인 셈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서양인들에게는 이 북한산의 출입이 결코 허락되지를 않았던 곳이었고, 그래서 확실히 이 산의 이름과 관련하여 알려진 신비스러움이 있었던 곳이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북한산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를 않았으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산을 말하였다면 그는 산의 정령인 용을 맞이하여야 하기 때문에 신성모독으로 인해 조용히 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한국의 외무부 장관 신분이었던 조병식씨가 어느날 정중하게 북한산을 방문할 수 있게 초청하여 주었고, 또한 친구도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겨울에는 북한산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 너무 미끄러워 등정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출발은 계속 지연됐다. 그러다가 마침내 S씨와 함께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음식과 하인들까지 제공받아 이들은 꽤 돌아가는 다른 길로 보냈다.
  
북한산 가는 몇 개의 길이 있다. 그중 한 곳인 서울의 서대문을 나가서 북한산의 서쪽 측면을 통해 빙 돌아서 올라가는 길은 평탄한 코스이다. 우리는 이 코스를 통해서 우리 행랑-수화물을 보냈다. 북동쪽문으로 통하는 길은 길고 다소 어려운 코스이다. 북쪽문은 오로지 국왕만이 사용하는 문이다. 우리는 북서쪽문을 선택하였다. 내 친구 Mr. S-그는 이곳의 오랜 거주자이고, 도시 밖과 안의 모든 일에 아주 해박하다-가 말하기를 우리가 가는 길이 훨씬 유리한 점이 이 길은 아주 그림같은 협곡을 지나야 하고 이외에도 유한한 인간들이 오르지 못한 포인트와 봉오리들이 있기에 다리 힘을 더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내가 대답하였다. 에구...줄 베르느는 어디 있나? 이걸 써서 남겨야 하는데. 즉 우리는 단순히 북한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탐험가가 되어 영원성을 확보함이리니.
  
내 친구 Mr. S는 영국인이며 아주 즐거운 친구이자 여기 코리아의 최초 정착자 중 한사람이고, 유럽과 미국의 모든 서울 거주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흰색 플랜넬 바지를 입고 목이 긴 브로간 단화를 신었으며 투구형 모자를 쓰고 손에는 알펜스틱을 집고 우리는 511일 오전 출발하였다. 조선의 게으른 군중들-할머니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개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의식적인 참을성을 가지고 거리를 메운 인파를 헤치며 북서문(창의문)밖으로 향하였다.

날씨는 아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웠고 우리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것옷을 벗으면서 아주 더운 등산이 되리라 예상하였다. 아주 고통스러운 계곡길을 따라서 우리는 북동쪽 방향으로 걸으면서 마치 가마에서 말려 삐쩍 마른 듯한 그리고 글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흉측한 많은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내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이곳은 젊은 여인들은 어디 있나? 친구가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없지. 왜냐하면 이곳에는 태어날 때부터 늙어버리니까.
  
한시간의 활발한 걸음 후에 우리는 Mr. S의 결정에 따라 어떤 지점에 도달한 뒤 그의 지형학적 지식에 따라서 이 봉우리 위 돌출부위에서 우리는 쉬기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즉 발견되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내 친구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루트는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기어오른 뒤에 미끄러져 내려와야 하는.
  
내 열렬한 충고와 간언에 따라서 내 친구 Mr. S는 마치 거만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전에 이 길은 어느 누구도 가지 않았으니...” “누가 뭐라고 했나내가 다시 대답하였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지. 어느 날 아침 내가 밀라노 대성당의 첨탑에 있을때 였었지. 당신나라 출신(영국인) 한사람이 내 앞을 앞질러 갔네. 내가 도착하자 그는 나를 잡고서는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것인가요?” 내가 대답했다. “왜 당신은 더 나갈려 하는 것인가요?” “왜냐하면, 누구라도 여기까지는 올 수 있으니까요그는 약간 경멸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였네.
  
Mr. S는 나의 회상을 그냥 아주 편안하게 웃음으로 받으면서 돌아서며 이야기 하였다. “자 이제 산으로문자그대로 아주 잘게 부서지는 자갈(마사토)위로 우리는 거칠고 고추 선 산기슭을 아무 말없이 조용히 힘들게 올랐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로 힘을 허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어떻든 산행 중에 이렇게 하는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산기슭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를 만났는데 그 물줄기는 바위 위를 흘러 우리 머리 위로 흩날리면서 물방울로 감싸 주었다. 아 얼마나 이 순수하고 즐거운 시원함인가. 꿀이 따로 없도다, 신이시여! 실컷 그 물을 마셨을 때 우리가 그토록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던 까닭을 아마 독자는 눈치 챘을 지도 모르겠다. 서울이 얼마나 지독한 시궁창 속인지를 안다면 말이다. 정화라고는 전혀 되지 않은 서울 물은 마음을 놓고 마실 수가 없었다. “이 물 끓였나?” 는 서울의 시궁창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서양인들이 항상 퍼붓는 질문이었다.

 우와...마침내 우리는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 근처까지 거의 올랐고, 바로 뒤쪽으로 북한산이 솟구쳤다. 갑자기 내 동료중의 한사람-그는 아주 훌륭한 사냥꾼이다-이 갑자기 멈추어서 칼을 꺼내어 들고서 목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호랑이!” 아주 일반적인 사냥칼과 스미스-웨스턴 32구경, 그리고 코리아의 호랑이와의 첫 만남, 만일 그렇다면 이런 환상 혹은 아..독자여... 그가 태어난 정글에서부터 키워 온 그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단순하고 설명하기 힘든 어떤 한국으로의 인도는 거침없는 그의 자연인으로서의 본성 혹은 본능의 이성적인 대처가 그가 한 판단의 결과일 것이다. 조심스레 낮게 기어가면서 나는 이 용감한 친구를 따라서 동굴의 입구까지 다가갔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아주 커다란 둥근 바위의 갈라진 틈에는 분명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Mr. S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호랑이냐 아니냐-앞으로..
  
무릎으로 기면서 우리는 마침내 커다란 바위의 동쪽 끝자락에 다달았고, 그곳은 열려있었다. 우리는 동시에-정말로 다행이라고 말해야만 할텐데, 무릎을 꿇은 어떤 남자가 우리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하고 성스러운 기도에 몰입되어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사람 머리 위에 있는 바위에는 컵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어떤 다른 음식이나 물이 담겨있지 않았다. 내 카메라를 운반해 온 하인으로부터 들었는데 이 산속의 은둔자는 위대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고 한다. 젊은 날에는 그는 꽤 동작이 민첩했고 현재는 은둔과 명상과 기도를 통해 과거처럼 다시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중이라고 한다. 내가 카메라를 내려놓는 동안 도인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사람 죽이는 도구로 생각할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그가 공양드리는 모습에 사진기를 맞추자 약간 어색한 듯 움직였다. 동전 150, 10센트 정도를 주자 양반이라고 생각했는지 머리를 땅에 대며 절을 했다. 조상들의 그림자가 서린 채 자신 역시 후대로 흘러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 같다.그의 조상신을 초혼 하는 장면을 담았고 그것이 후손에게 물려지기를 꿈꾸는 것처럼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카메라를 다시 챙기고 우리 짐꾼을 따라서 다시 길을 나섰다. 무자비한 태양의 햇빛 아래서 고생 한 후 우리는 마침내 아무도 올라 서지 않았던 어떤 봉우리 정상에 도달하였다. 내 친구 S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여기 올라선 최초의 백인이다. 그게 우리다. 우리 이름을 지어 주자. 롱 앤 에스(Long & S)마운틴 으로“ S가 내 말을 끊더니 더 이상 자기 이름을 여기 붙이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 한다. 왜나하면 만일 그렇게 되면 나는 영국에 있는 지리학회 따위와 소통해야 하고 그러면 내 인생은 끔찍한 가위눌림을 당할테니까우리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서울로부터 1,350피트(411.48m) 높이를 가리킨다. 커다란 바위가 있어 Mr. S와 내 이름을 각자 새겼는데 우리 하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행위가 마치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혹시 이 글자 새기는 것을 방해 할 지도 몰랐으나 Mr. S의 특별한 금지는 없었다. 내가 말했다. “누구에게 기도할까? 산에 있다는 아주 나이 많은 산신령? 아니면 이 비탈진 언덕? 혹은 유구한 세월의 깊은 어둠? 친구여! 이건 아마도 누군가의 즐거움에 봉사할 것이야. 누군가 우리처럼 이렇게 천천히 쉬면서 등반하여 우리가 목숨 걸고 올랐듯이 우리를 따라 하면서 이 현기증 나는 곳에 오른 이들을. Cui bono? (누구였을까?) 벌써 오후 세시이다. 우리 앞의 행로는 아직도 고통스럽게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 보고 있는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우리 앞쪽으로는 수직의 희미하게 빛나는 길이 보이기 때문에.
  
한 바탕 고생을 더한 끝에 우리는 어느 뾰족이 솟은 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잠시 서서 휴식을 취하며 뒤를 돌아보니 멀리 우리 짐꾼 하인이 보이고 그가 카메라를 메고서 우리가 온 길을 따라서 산기슭을 걷고 있었다. 마법같은 환상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보기 좋은 장면인가! 서울을 향한 남쪽 방향으로 사암(sandstone) 산들이 길게 이어지고 하나는 다른 하나에 겹쳐서서 아주 가깝게 서 있고, 정상 선이 그리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나타나며 마치 모든 형상을 따라하듯이 사람 같기도 하고 악마 같은 모습들이며 정말 사람 손으로 빚은 모습들이었다. -(북악) 너머로는 도시를 둘러 싼 성벽 윤곽들까지 아주 선명히 조망이 되고, 수도 서울은 저기 북악과 남쪽의 남산이 함께 만들어내는 분지 속에 둥우리를 튼 새집 마냥 독특하면서도 낭만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이 도시가 마치 밀집과 오물 덩어리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암석과 타일로 이루어 진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이렇게 먼 거리에서 조망을 하면 아주 아름답게 보여진다. 우리 앞쪽에 남쪽 방향으로 깊은 협곡이 놓여 있고 북한산의 거대한 남쪽 문으로 이어진다. 2000피트(609.6m)아래로 어두운 심연 아래 웅장하고 빛나면서 독특한 자태로 내려다 보인다. 아주 깜짝 놀랄 만큼의 효과이면서 어떤 생각이 머리 속으로 스쳐 가는데 마치 지옥(Inferno)문을 바라보는 것 같다.
  
한시간의 등반 후 우리는 문앞에 다가섰고, 거기에는 아주 빠르게 태양이 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카메라를 펼치고 오른편 골짜기를 따라 커다랗게 이어지는 작은 오름길을 따라서 조리개를 한참 열어 놓고 촬영하여서 마침내 이 사진을 얻었다. 근처에는 부처님을 모신 절이 있었다. 이 절 주지스님은 아주 잘 면도 되어지고 그리고 풍채가 좋았는데 동자승을 대동하여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과도하게 열성적으로 또한 아주 밝은 즐거움으로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해 주셨고 아주 호기심 많고 또 친밀함으로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내 촬영기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진을 보여달라고 계속 고집을 피웠다.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얼마간 조작을 거쳐야 사진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눈가의 의미심장한 주름이라든가 뚱뚱한 얼굴 살에 반쯤 묻혀 감겨질 것만 같은 눈을 통해 짐작하건대, 그는 내 거절을 필시 카메라에 담긴 동양인의 마음과 연결시키는 어떤 주술적인 기능 탓으로 돌렸음이 분명했다.

 주지스님과 동자승에게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그리고 우리는 대남문 안으로 서둘러 들어섰는데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에 문이 있다는 것은 단순한 환상일까? 이곳은 어떻든...지옥이다. 어둠이 그렇게 진하게 내리지는 않았기에 커다란 성벽의 외관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치 거대한 뱀이 산의 마루금을 따라서 똬리를 틀은 것처럼 하나는 다른 하나와 핀으로 연결이 되어서 한쪽으로는 산기슭으로 따라서 내려가고 또 한쪽으로는 영마루를 따라서 올라가며 서로 마치 거대한 코일 모양으로 엮여저서 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13개의 문이 성벽에 뚫어져 있고, 산의 정상 이곳 저곳에는 장대(turret)가 있어서 여기서 밖을 관찰하고 전체를 지휘하였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계곡을 가로질러 내부 저지선이 벽으로 서 있고 여기에도 이중 철문으로 되어진 문이 있었다. 아주 갑자기 어둠이 내려앉으며 산을 덮었고 빛이 사라졌다. 거대한 어둠의 동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아래 서 있는 모습이었고 산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어둠이 불쑥 일어서는 모습이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 않았기에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햇살은 어두움을 뚫고서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지옥의 눈을 석양으로 물들였다. 마침내 Mr.S 가 입을 열었다. “이러면 안돼, 우리 서둘러야 하네. 그러나 정말로 아 정말 위대한 장면이네. 그리고 진실로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배가 고파요.”
  
길을 잘 아는 짐꾼의 안내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 사람은 이 길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작은 소로길을 따라서 우리는 어느 스님을 마주쳤다. 그 스님은 우리를 벌써 몇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려 깊은 조병식은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해 놓으라고 미리 그에게 일러 두었던 것이다. 스님들 보살핌 속에 우리는 손님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요사채(yamen-衙門-객사)로 안내되었다. 아마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이번 일정과 여기 등장은 이곳에 있는 모든 스님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호기심이 이 나라의 국가적인 확실한 특징임은 절대로 결코 예외가 없었다. 이런 특징이 결국 이 한국을 서구 세력(제국주의)와 협약을 맺도록 하게 하였고 호기심을 충족시키면 은둔의 나라였을 때 만끽했던 평화와 고립을 그리워할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이곳 주지스님은 우리를 한국음식으로 차려진 어마어마한 식사 앞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단순하게 저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전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동양인들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는 건, 그러니까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치우는 건 나중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양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지위를 간수하고자 노력하는 이라면 이런 음식을 먹음으로써 공직에 나갈 기회를 찾을 수도 있겠다. 내가 알기로도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공직에 나간 경우도 있다. 나나 내 친구 Mr.S는 그런 공직을 기대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좀 더 기다렸다가 우리 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하인이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우리보다 빨리 여기 도착하였고 바삐 우리 음식을 준비 하였던 것이다.
  
S와 나는 너무도 배가 고팠다. 그러나 유럽식 식사 방식은 이곳 한국식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얌전하다. 한국식 식사관습으로는 보통 작은 나귀 한 짐 치의 쌀을 먹고 이어 트림을 뱉는다. 트림은 일종의 성취의 표현으로 이해되는데 폭식에 따르는 고통을 누그러뜨려주는 역할을 한다. 아랍인들도 투르크인들과 마찬가지로 트림꾼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 밤을 매우 푹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는데 아쉽게도 하늘엔 구름이 덮였고 그러더니 잠시 후부터 비가 계속 내리는 날이 되었다.
  
주지스님은 우리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우리를 절로 초대하였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서 그들의 아주 높낮이가 뚜렸한 기도와 종의 울림 소리를 몇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다. 나와 S가 담배도 피우고 잡담을 나눌 때에도 스님은 그 끊임없는 독경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염불하는 동안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 보았는데 마치 우리가 어떤 느낌을 받는지 살피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매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 처럼 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을 매우 즐겁게 하였던 것으로 보여졌다. 처음에는 이 색다른 경험 속에서 무척 흥미가 있었다. 나중에는 너무 단조로움 속에서 헤멨다. 우리는 작은 성의로 절의 수선비를 헌금하였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를 하였고, 작은 기부는 받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 외는 이 절을 위해서 별로 할 것도 없었으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부하였다.
  
이튿날(12) 아침, 비는 그쳤지만 아직 먹구름이 울렁거렸다. 필요한 빛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어도 나는 카메라를 펴서 절을 사진에 담았고, 또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스님과 그곳 사람들에게 포즈를 취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과는 기대하였던 것 만큼 만족스럽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비록 급속히 쇠락해 가지만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절들 중 하나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북한산의 한쪽 높은 언덕에서 사진 몇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여기 올린 사진이며 이것 만으로는 이 산의 높음을 제대로 전달 할 수 없다. 동과 서로 뻗은 이 골짜기의 살짝 굽은 곳으로 조금 물러서면 비석들로 꽉 찬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자리를 보게 된다. 이 비석들은 망자에 대한 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무례한 백성들에게 선의를 일깨워주는 선한 행실을 기록해 놓았다. 안타까운 일은 이 장면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다. 현상을 위해 일본에 보냈는데, 필시 그 사진들은 일본 사진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게 틀림없다. 그러더니 나중에 목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성문 안쪽에서 찍은 사진들도 함께 보냈는데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야말로 나같은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흔히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계곡 물줄기를 따라서 우리는 서쪽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곳은 아주 즐거운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도 있고, 여기 저기서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흩뿌려지고 큰 바위들은 그 물길을 가로막아 서 있으며 마침내 우리는 서쪽 문에 도달하였다. 이내 우리는 그곳 경비병들에 둘러싸였다.그 사람들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커다란 즐거움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쏠려고 하는 것이야?” 경비병들이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우리 짐꾼 하인이 심하게 웃어제끼면서 재차 안심시켰다. 이내 부끄러움을 벗어던진 이들은 사진을 찍어 달라고 졸라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어둠도 내가 거절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뒤돌아 걷기 시작해 우리는 점심때야 되어서 절에 돌아왔다. 서울부터 아주 혹독한 도보여행으로 인해 다리가 많이 쓸려있었다. 심지어 S는 자주 완전히 지쳤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은 아주 쉬운 것이다.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나니 오후 한시가 되었고, 날씨가 호전될 전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지체 없이 바로 서울로 돌아갈 길을 서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솥단지와 냄비, 상자들이 꾸려졌다. 주지스님이 우리 채비를 신경 쓸 틈도 주지 않고 나귀에 짐을 실어 서쪽 문에 내어놓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배웅 나온 이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걸었다. 문에 도달하여 도저히 저 장면을 찍지 않을 수 없었는데 비도 오고 안개마저 껴 있으며 카메라는 뒤쪽에 있었다. 결국 성공하지를 못하였다. 성 밖으로 나오자 스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잠시 지체 시키더니 사진을 찍어 주기를 원하였다. 어떻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야 할 길은 매우 멀다. 내려가는 길은 그리 험하진 않았지만 도성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와 이 조랑말이 서둘러서 가야 함이 과제였다.

북쪽 문에 들어설 때 종로의 큰 종은 울리고 있었고 쇠북과 나팔소리도 울렸다. 우리는 여유롭게 좁은 거리들로 들어섰다. 다시 돌아왔음에 매우 즐거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삼일동안의 즐겁고 순수한 북한산의 공기를 들이켰던 우리의 후각은 바로 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괴로움으로 돌변하였다.

 거리 모퉁이에서 S와 이별하고, 그는 다른 방향으로 그의 집으로 향하였고 나는 짐꾼 하인을 앞세우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잠자리로 향하였다. 계속 나는 북한산 속에서 울리는 목탁과 종소리와 군인이자 승려들인 그들의 기도와 중얼거림 소리를 들으면서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경험한 아주 특별하고 신기한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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