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지北漢誌
聖能·瑞胤 共編. 목판본. 1745년 刊.
1책(24장). 半郭 21.6×15.0㎝, 有界, 6행 23자 註雙行, 上二葉花紋魚尾. 地圖.
後識; 乙丑十一月上澣山人聖能識.
〈북한지北漢誌〉는 1745년(영조 21) 성능聖能 스님이 편찬한 삼각산三角山 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대한 역사지리서이다. 〈북한지〉는 〈북한산성지〉의 약칭이며 ‘북한산지’의 약칭이 아니다. 〈북한지〉는 북한산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숙종 당시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의 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은 지금부터 300년 전, 1711년(숙종 37) 4월 3일부터 동년 10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많은 반대와 경제적인 악조건을 극복하고 완성하였다. 이는 숙종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임금과 김우항金宇杭과 김중기金重器 같은 현신賢臣과 성능聖能이라는 걸승傑僧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북한지〉를 편찬한 성능은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嚴寺 출신이지만 어떻게 이 산성 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산성을 쌓기 전 산성 내에 중흥사重興寺란 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 절에 주석駐錫하였던 인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성 공사를 하면서 요충지에 중흥사 외에 12개의 사찰을 새로 세웠는데, 중심 사찰이 중흥사고 그 주지가 바로 성능이었다. 중흥사는 승병의 군영軍營이라는 뜻으로 치영緇營이라고도 불렸고, 주지승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여 전국 각 사찰에서 교대로 올라 와 주둔한 승병 350여 명을 통솔했다.
산성의 축성과 여러 사찰의 증설, 승병의 관리를 시종일관 감독한 성능은 1745년 북산산성을 떠나 화엄사華嚴寺로 내려갔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섭에게 자신이 관장했던 모든 사무를 인계하고 그 사실들을 종합하여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다. 14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책이 바로 〈북한지〉이며, 간행은 새 총섭 서윤瑞胤이 하였다. 3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북한산성과 함께 살아온 노스님이 북한산성에 남긴 마지막 선물인 셈이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첫머리에 ?북한도北漢圖?라고 한 북한산성의 조감도가 3장 실려 있고, 이어서 도리道里, 연혁沿革, 산계山溪, 성지城池, 사실事實, 관원官員, 장교將校, 궁전宮殿, 사찰寺刹, 누관樓觀, 교량橋梁, 창름倉?, 정계定界, 고적古蹟 등 14개 항목으로 세분되어 있다. 각 항목의 제목은 흑면黑面에 음각陰刻하였고, 내용은 한 자 낮추어 썼으며 주註는 쌍행雙行으로 하였다. 각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리道里 편에는 동으로는 양주목楊洲牧, 서로는 고양군高陽郡, 남으로는 서울[京都], 북으로는 홍복산弘福山까지의 거리와, 북한산성이 본래는 양주목楊洲牧에 속했으나 당시 한성부漢城府에 이속移屬된 사실을 기록하였다.
연혁沿革 편에는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 이후로 일찍이 온조왕溫祚王이 쌓았던 옛 성터에 1711년 북한산성을 쌓기까지의 내력과 변천과정을 기록하였다.
산계山溪 편에는 삼각산三角山의 주봉主峰인 백운봉白雲峰, 인수봉仁壽峯, 만경봉萬景峯을 포함한 32개의 봉우리, 천룡강天龍岡 등 3개의 강岡(지금의 ridge, 즉 능선), 의상대義湘臺등 8개의 대臺, 장춘동長春洞 등 12개의 동부洞府, 여기담女妓潭 등 3개의 담潭(흐르는 여울의 웅덩이), 국영폭國寧瀑 등 2개의 폭포에 대한 위치 및 이들에 관한 시문詩文이 수록되었다.
성지城池 편에는 성의 둘레와 높이, 문의 수와 크기, 장대將臺의 수효와 이에 관련된 시문詩文, 성랑城廊(성안의 군대 막사), 연못, 우물의 수효 등 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여러 사항이 수록되었다.
사실事實 편은 북한산성 축성사실을 말하는데, 1659년(효종10)부터 일기 시작한 산성축성 논의를 비롯하여 1711년에 완성完成을 보기까지의 복잡다난했던 여러 의견들을 약술한 것이다. 이 항목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부분으로, 책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의 쪽수를 할애하여 기술하고 있다.
관원官員 편은 경리청經理廳의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낭청?廳, 관성장管城將의 인원과 임무에 대한 기록이다. 경리청이란 북한산성이 완성된 뒤 그 경비를 전담키 위해 신설한 관청으로 도제조都提調는 영의정領議政이 겸임하였다.
장교將校 편에는 경리청에 예속된 관성소管城所, 각문장各門將, 승영僧營, 훈련도감訓練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호조戶曹 등의 장교將校와 이졸吏卒의 직책, 인원수가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성의 관리 인원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궁전宮殿 편에는 산성 내 상원봉上元峯 밑에 있던 행궁行宮의 내전內殿, 외전外殿의 규모와 칸 수를 기록하였다.
사찰寺刹 편에는 향림사香林寺를 비롯 21개 사찰의 창립연대, 위치, 연혁, 칸 수 등과 이곳을 두고 읊은 선인先人들의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다.
누관樓觀 편에는 항해루沆瀣樓, 산영루山映樓 세심루洗心樓의 위치, 규모 등과 이에 관한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다.
교량橋梁 편에는 환선교喚仙橋를 비롯한 7개의 다리 위치를 기록해 놓았다.
창름倉? 편에는 경리청의 상창上倉, 중창中倉, 하창下倉, 평창平倉, 호조창戶曹倉의 위치와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각 유영留營 위치를 기록하였다.
정계定界 편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관할 구역을 기록하였다.
고적古蹟 편에는 고석성古石城, 신혈사神穴寺, 최공전지崔公戰地(최영崔瑩), 민공유서閔公遺棲(민지閔漬) 등 고적에 얽힌 이야기들과 관련 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끝에는 성능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축성사실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나, 동시에 산의 이름과 절의 변천, 그리고 여러 운치 있는 곳의 풍경을 읊은 옛사람들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북한산을 알기에는 더없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1711년 축성을 시작하여 문루門樓나 그 밖의 부대시설이 거의 완성될 무렵인 1712년 경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1745년 11월 판각이 이루어질 때까지 약 30년 동안 부대시설의 이름이 바뀌거나 새로 생길 때마다 그 사실을 첨가하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착오가 눈에 띈다. 즉, 30년 사이에 소동문小東門이 대성문大城門으로 이름이 바뀌고, 금위영 유영禁衛營留營이 처음에 소동문 가까이에 있다가 보국사輔國寺 밑으로 옮겼다. 바로 이 두 곳에 관한 기록을 정확하게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오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대성문과 중성문의 한자 표기에 ‘성城’자와 ‘성成’자를 혼동해 쓰고 있는데, ‘성城’자가 옳다. 이 책 제 5엽葉의 앞장을 보면 대성문大城門과 소동문小東門이 같이 실려 있는데, 이곳의 소동문은 삭제해야 옳다. 또 18엽의 뒷장 보국사 아래의 주註를 보면 “금위영 밑에 있다[在禁衛營下]”라는 기록의 ‘下’자는 ‘上’의 착오다.
그리고 3엽 뒷장 등편봉登片峯의 ‘편片’자와 18엽葉 앞장 중흥사重興寺 주註에 보이는 등안봉登岸峯의 ‘안岸’자는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른다. 또 10엽 뒷장에 “4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9월에 공역을 마쳤다[四月始築九月訖役]”라는 기록만 보고 모두 북한산성이 4월에 시작하여 9월에 축성이 끝났다고 하는데, 이는 주註에 “성의 역사는 삼군문에 나눠주어 4월 초3일에 공역을 시작하여 9월에 이르러 점차적으로 끝마쳤다[城役分授三軍門 四月初三日始役 至九月?次畢役]”라는 기록을 보지 않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삼군문三軍門(즉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나누어서 공사를 하였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축성을 마친 군문이 9월이고, 나머지 두 군문도 차례로 축성공사를 마쳤다고 해석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도 모든 공역을 끝마친 날짜가 10월 18일로 기록되어있다.
이 책은 북한산성의 승려들에 의하여 쓰여지고 판각되어 간행되었으며, 이 책의 책판은 북한산성에서 간행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수십 종의 책판과 함께 태고사太古寺에 보관되어 오다가 갑오경장(1894)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책을 7, 8종 보았는데 각 책마다 판본상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여러 번에 걸쳐 찍었던 것 같다. 본서는 그 중에서 중간 쯤에 속하는 것으로, 처음 판각한 지 100여 년 후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성능聖能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성능性能’이라고 쓰기도 했고, 호號는 계파桂坡다. 본래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였으나, 화엄사華嚴寺의 각성覺性스님 문하에서 수행하여 화엄사 스님이 되었다. 성능은 말년에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머무르면서 통도사 계단탑을 증축하고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웠다. 불사佛事에 남다른 공력을 드렸던 스님이다.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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