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121권, 영조 49년 10월 27일 壬子 2번째기사 1773년 청 건륭(乾隆) 38년
행 부사직 구선행이 상소하여 북한산성의 방비 등에 대해 아뢰다
○行副司直具善行上疏, 略曰:
在昔己亥, 固根本之聖敎, 欲爲修築北漢舊城, 又塞造紙署洞口, 以爲臨難移御之所, 睿智神略, 慨然於都城先潰之患。 而辛卯繼述之聖斷, 卓越千古, 始築北城, 爲固守根本之計, 及至丁卯我聖上爰定大計, 群策畢收, 守都綸音, 如金石之堅, 四時之信。 亦嘗有敎曰, 至於摠戎廳, 其責尤重。 兵法曰, 先據北山者勝, 北漢卽都城之咽喉也。 敵若據此, 何以措手? 故昔年築山城設水門, 而近者摠戎使兼畿閫, 處蕩春臺者, 蓋爲此也。 又令一枝軍, 遮遏沙麓之間, 敵非徒不敢犯水門, 亦不踰沙峴矣。 惟彼北城, 與鍊臺爲國都之後關, 天作金湯, 擁圍於神京之背。 四面險截, 易守難攻, 又非南漢之可比。 而今人不能深究乎主客攻守之利害, 又眩於前後去邠之已事, 莫敢主張於堅守之論。 噫! 摠戎移設鍊臺之後, 先臣殫竭心思, 畢築西城, 又欲防遏東邊山麓。 而至於兄弟峰以下, 則久通樵路, 以致沙土流下, 崖岸漸圮, 從其外面, 添補新土, 被莎植木, 接連於曲城下, 仍成山柵, 則斗絶懸崖, 誰敢容易攀登? 況且西城逶迤, 北自香林, 南抵佛巖, 便成重金襲湯, 漢北門路, 乍開石川, 巴字屈曲, 左右擁逼, 騎難成列, 又無別路之可入, 亦何敢輕騎跳踉於兩山頭矢石之下哉? 此城一固, 寧容暴客之深入乎? 許多般火器, 何者無用, 而造化循環砲一窩蜂箭, 俱是萬人敵也。 臣造此數器, 果驗神機之無出其右。"
答曰: "今覽卿章, 卿誠可嘉。 予欲問之, 明日診筵, 與右相入侍。“
행 부사직(行副司直) 구선행(具善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전 기해년 에 ‘근본을 튼튼하게 하라.’는 성교(聖敎)는 북한산(北漢山) 옛 성(城)을 수축하고 또 조지서(造紙署) 동구(洞口)를 막아서 난리가 나면 이어(移御)할 장소로 삼으려고 하신 것이니, 〈이러한〉 예지(睿智)와 신략(神略) 은 도성(都城)이 먼저 허물어지는 근심을 개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묘년 에 계술(繼述)한 성단(聖斷)은 천고(千古)에 우뚝하여 비로소 북한산성을 쌓아 근본을 굳게 지키는 계책을 삼았으며, 정묘년에 이르러 우리 성상께서는 큰 계책을 정하고 뭇 사람의 꾀를 모두 거두어서 도성을 지키자는 윤음(綸音)이 금석(金石)처럼 견고하고 사시(四時)처럼 미더웠습니다. 또한 일찍이 하교에 이르기를, ‘총융청(摠戎廳)에 이르러서는 그 책임이 더욱 중하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북산(北山)을 먼저 점거하는 자는 이긴다.」고 하였으니, 북한산은 바로 도성의 요충(要衝)이다. 적이 만약 이를 점거하면 어떻게 손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옛날 여기에 산성(山城)을 쌓고 수문(水門)을 설치하였으며, 근래에는 총융사(摠戎使)가 경기 병사(京畿兵使)를 겸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있는 것은 대저 이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지군(一枝軍)으로 하여금 사록(沙麓) 사이를 막으면, 적이 감히 수문을 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현(沙峴)도 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북한산성은 연병대(鍊兵臺)와 더불어 국도(國都)의 후관(後關)이 되며, 하늘이 만든 금성탕지(金城湯池)로서 도성(都城)의 등[背]을 옹위(擁圍)하고 있습니다. 사면(四面)이 험하고 높아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니, 또한 남한산성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주객(主客)과 공수(攻守)의 이해(利害)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고 또 전후(前後)에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한 지난 일에 현혹되어, 도성을 굳게 지키자는 논의를 감히 주장하지 못합니다. 아! 총융청을 연병대로 옮긴 뒤에 선신(先臣) 이 마음을 다하여 서성(西城)의 축조를 마치고, 또 동쪽 산록(山麓)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형제봉(兄第峯) 아래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나무꾼이 다니던 길을 통해 모래흙이 흘러내려서 언덕이 점점 허물어지게 되었으니, 그 외면(外面)에 새로이 흙을 보충하여 잔디를 입히고 나무를 심어서 곡성(曲城) 밑에까지 연접하게 하고 이어서 산책(山柵)을 만든다면, 높이 솟은 절벽을 누가 감히 쉽게 올라오겠습니까? 더욱이 서성(西城)은 꾸불꾸불한 모양으로 북쪽은 향림(香林)으로부터 남쪽은 불암(佛巖)에 이르기까지, 거듭 쌓인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이루었으며, 한북문(漢北門) 길은 약간 석천(石川)이 열렸으나 파자(巴字)로 굴곡(屈曲)하여 좌우가 막히고 좁아서 말을 타고 열(列)을 이루기 어려우며, 또 다른 길로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또한 어찌 감히 경기(輕騎)가 두 산머리의 화살과 돌 밑에 날뛸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성을 한번 견고하게 한다면 어찌 적병(賊兵)이 깊이 침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허다한 화기(火器)가 어느 것이나 쓸모가 없지만, 조화 순환포(造化循環砲)와 일와 봉전(一窩蜂箭)은 모두 만인(萬人)을 대적할 것입니다. 신이 이 몇 가지 병기(兵器)를 만들었는데, 과연 신기(神機)가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징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경의 정성이 가상하다. 내가 묻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내일 진찰하는 자리에 우의정과 같이 입시(入侍)하라."
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