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築城)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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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30년(1704)에 신완(申琬)이 아뢰기를, “북한산성은 매우 험조(險阻)한 데다 도성(都城)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대가(大駕)가 이곳에 주필(駐蹕)한다면 도성의 사민(士民)들이 힘을 합쳐서 이를 굳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록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더라도 결단코 이를 모두 포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를 방해하였다.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보장(保障)할 수 있는 곳으로 말하면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다로 도적이 침입하게 될 경우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말하면 이는 비록 산세(山勢)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실로 천연의 요새(要塞)로서 이 또한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성에 대한 계책으로 말하면 신의 생각은 수상(首相)과는 다소 다릅니다. 도성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북한산성의 둘레는 도성에 비하여 5리나 더 된다고 하며 지세의 험함도 도성보다 더하므로 이 또한 넓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북한산성을 새로 쌓는 공력을 도성을 증수(增修)하는 데 들인다면 그것이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으로서 사민(士民)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지키면서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 부모를 보호하고 처자를 보존하게 한다면 어느 누군들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바쳐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신완이 말하기를, “험조(險阻)한 점으로 말하면 북한산성이 훨씬 더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에 주필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이미 북한산성을 쌓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성이라도 쌓아서 근본에 대한 계책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여가 말하기를,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말하면 바다의 방위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먼저 육지의 병력을 안정시켜서 근본을 튼튼하게 한 다음에 이를 굳건히 지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은 비록 험고(險固)하다고 말하지만 만약 도성을 적에게 내주고 위축된 병력을 가지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적들과의 간격이 단지 하나의 성문(城門)을 격한 것이 될 뿐이니, 이러고도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감히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성을 버리고서 군부(君父)를 모시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만전(萬全)을 도모하는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경인년(1710, 숙종36)에 장신(將臣) 이기하(李基夏)와 김석연(金錫衍)을 보내어서 북한산성 축성(築城)의 편의 여부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이에 김석연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이덕형(李德馨)은, 바로 도성의 지근(至近) 거리에 이와 같은 천연의 요새가 있는데도 이를 그냥 버려두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바다의 도적이 염려된다는 북자(北咨 청나라의 자문(咨文))로 인하여 상도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묘년(1711, 숙종37) 4월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이해 9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다음 해 임진년 4월에 거가(車駕)가 이곳에 행행(幸行)하여 그 천연의 험고함에 감탄하였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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