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노린 거짓 고발 — 초복 사흘째, 두 사수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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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노린 거짓 고발 — 초복 사흘째, 두 사수의 최후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국보 제151-2호) — Wikimedia Commons, KOGL Type 1

 

10월 11일 초복(初覆死囚)으로 시작한 사흘간의 기록이 10월 13일, 단 하나의 기사로 끝납니다. 자비의 제도를 악용하려던 두 사수의 이야기입니다.

10월 11일, 사형수 재심의 첫날. 10월 12일(정묘)에는 "仍行初覆" — 재심이 이어졌고, 연석에서 이어진 하품 소리에 승지가 문책당하고, 밤에는 팥알만 한 우박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10월 13일(무진), 실록의 기사는 단 하나뿐입니다. 전옥(典獄)의 죄수 윤진흥(尹震興)과 장천련(張千連)이 '괘서(掛書) 사건'을 고발했다는 기록입니다.

괘서는 익명의 벽보 — 조정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범인을 찾고 있었고, 사수(死囚)라도 고발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두 사람에게는 마지막 동아줄이었습니다.

장천련의 진술은 그럴듯했습니다. 1702년 9월, 같은 칸에 있던 장의동의 사인 이성번(李盛蕃). 올해 3월 13일, 형(刑)을 받으러 형조로 가던 길에 혜정교에서 만난 이성번의 아들 이방억이 귓속말로 전한 "부자가 방(榜)을 걸 계획" — 일이 성공하면 방송(放送)될 것이라는 약속과, 파주로 찾아오라는 당부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문이 시작되자 거짓말은 하나씩 무너졌습니다.

  • 이성번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1709년 삭녕에서 화적의 칼에 맞아 숨졌습니다.
  • 아들의 이름은 방억(方億)이 아니라 방엽(方燁), 사는 곳은 파주가 아니라 부평이었습니다.
  • 백이(白伊)라는 이름의 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장천련이 "3월 13일 형조에 갔다"고 한 날, 형조의 문서에는 그가 형조에 간 기록 자체가 없었습니다.
  • 목격자라며 내세운 죄수 정팔익(鄭八翼)은 "그런 일에 참여한 적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자백합니다. 장천련은 "이성번이 글을 잘 쓰는 것을 알았고, 사수가 고발하면 죽음을 면한다는 말을 듣고" 윤진흥과 짰다고 했습니다. 윤진흥은 장천련이 언문(한글)으로 쓴 수표(手標)를 받아 정장(呈狀)까지 했습니다. 그의 결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죽음에서 살아날 마음으로" 고발을 허락했고, 수표를 받은 것은 "일이 이루어지면 상을 받을 수 있고, 허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분은 엄했습니다. 부대시참(不待時斬) — 가을 추분을 기다리지 않는 즉시 처형 — 그리고 가산 적몰. 자비를 노린 거짓이 오히려 가장 빠른 죽음을 불렀습니다.

초복은 임금의 자비를 사형수에게 베푸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비의 문이 열리자, 어떤 이들은 그 틈을 노렸습니다. 10월 11일의 엄숙한 재심, 10월 12일의 하품과 우박, 그리고 10월 13일의 거짓 고발과 처형. 사흘간의 기록은 자비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여주며 끝납니다. 10월 14일과 15일에는 초복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원문: 숙종 37년 10월 13일 (국역, sillok.history.go.kr)
이전 글: 10월 11일 편, 10월 12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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