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영(趙萬永) 신도비
◆ 번역문
유명조선(有名朝鮮)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증(贈)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시(諡) 충경(忠敬) 조공석애(趙公石厓)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조선(有名朝鮮)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겸(兼) 이조판서(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시(諡) 충경(忠敬) 조공(趙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홍문관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원임(原任)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 안동(安東) 김흥근(金興根)이 짓고, 생질(甥姪) 승록대부(崇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知)경연(經筵) 춘추관사(春秋館事) 동지(同知)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시강원좌빈객(侍講院左賓客) 김세균(金世均)이 삼가 쓰다.
국구(國舅) 석애공(石厓)을 장사 지낸지 3년만인 무신년(戊申年)1)에 헌종대왕(憲宗大王)께옵서 조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시(諡) 충경조공(忠敬趙公) 만영지묘(萬永之墓), 배(配) 증덕안부부인(贈德安府夫人) 은진송씨(恩津宋氏) 부좌(祔左)라는 마흔 한 자를 써서 내리시어 비에 새겨 나타내기를 명령하시었고, 아우 문충공(文忠公) 인영(寅永)이 그 음기(陰記)를 지었다. 그러한지 20년이 지난 정묘년(丁卯年)2)에 손자 성하(成夏)3)가 신도비를 세우려 하는데, 영하(寧夏)4) 가 이조판서인 홍공(洪公) 재철(在喆)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흥근(興根)5) 에게 명(銘)을 부탁하여 왔다. 오직 흥근(興根)만이 공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공을 뵈어 온지 오래되고 공을 사모함이 깊었으니, 노쇠하고 글을 못한다 해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관력(官歷)과 행적(行蹟)을 차례대로 열거하면서 공이 왕가(王家)에 근로한 바와 성조(聖朝)에 공(功)이 있는 친척에 융숭히 보답한 바를 돌에 쓰는 바이다.
공(公)의 자는 윤경(胤卿)이고, 석애(石厓)는 그의 호이다. 풍양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휘(諱) 맹(孟)인데, 본조(本朝)에 들어 와서 벼슬이 서로 잇달았고 대대로 명덕(名德)이 있었다. 증조부의 휘는 상경(尙絅)6)이니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경헌(景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신축년(辛丑年)7)의 건저(建儲)8)때에 대책(大策)을 밀찬(密贊)하였으므로, 금상(今上) 병인년(丙寅年)9)에 세사(世祀)를 명하여 충훈(忠勳)에 보답하게 하였다. 조부의 휘는 엄(曮)10)이니 이조판서를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올곧은 도(直道)를 잡고 권흉(權凶)들과 겨루다가 유배당하여 돌아갔다. 아버지의 휘는 진관(鎭寬)이니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겸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효문(孝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9년 동안 온갖 성의를 다하여 아버지의 원한을 씻으니 정조(正祖)께옵서 효자라고 칭찬하시였다. 비(妣)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으니, 부사(府使)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익빈(益彬)의 딸이다.
공(公)은 영조(英祖) 52년 병신(丙申) 5월 5일에 출생하였고, 순조(純祖) 원년(元年) 신유(辛酉)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계유년(癸酉年) 봄에 현륭원(顯隆園)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겨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6품에 올라 종부시주부(宗簿시主簿), 병조좌랑(兵曹佐郞), 문신선전관(文臣宣傳官)을 겸하였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뒤에 사간원에서는 헌납(獻納)과 사간(司諫)에 오르고, 시강원에서는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필선(弼善)을 거쳐 겸보덕(兼輔德)에 올랐다. 또 그 이듬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그 때 <영선록(瀛選錄>11)에 부정이 있다라고 투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공(公)은 비록 자신에게 크게 관련된 일은 아니었으나, “남들의 말을 인책(引責)치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 부응교(副應敎) 등에 제수하는 사령(辭令)이 십여 차례 내렸으나 한 번도 명을 받들지 않았다. 겨울에 암행어사로 호남지방을 7개월간에 걸쳐 안찰(按擦)하고, 그 이듬해 여름에 임무를 마쳤는데, 탐관오리를 내쫓고 국고(國庫)의 손실을 적발하였으며 숨은 선량한 사람을 발굴하고 쌓였던 억울한 일을 신장시켰으므로, 호남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한다. 그 이듬해 동학교수(東學敎授)12)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고, 또 그 이듬해에 장악원정(掌樂院正)과 사복시정(司僕시正)에 임명되고 심양사(瀋陽使)의 서장관(誓狀官)으로서 행사를 전담하여 처리하였는데, 풍모가 엄정하였다.
기묘년(己卯年)13) 가을에 지금의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세자빈(世子嬪)의 삼간택(三揀擇)에 들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되고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가 체임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고, 가례(嘉禮)를 치르고 나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듬해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고, 가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공(公)이 “자신의 처지가 전조(銓曹)14)의 책임을 맡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라고하여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형조참의(刑曹參議)와 성균광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신사년(辛巳年)15) 정월에 임금께서 공의 “지망(志望)이 간성(干城)의 책임을 맡을 만하다”라고 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시키고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하니, 공이 두려워하며, “여러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게 승진되어야만 허물이 적게 되고, 또 저 같은 서생(書生)이 어떻게 군병(軍兵)을 통솔할 수 있사오리까?”라고 간곡하게 아뢰었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잇달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동년 10월에 세자빈이 홍역을 치를 때 별입직(別入直)하였으며, 12월에 왕세자가 홍역을 치를 때 또 별입직하였다. 별입직을 한 후 가의대부(嘉儀)에 승자되었다.
을유년(乙酉年)16)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되고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퇴하여 호조(戶曹)로 옮겼고, 동년 10월에 전지(傳旨)가 내려졌고 자현대부(資憲大夫)에 승자되었으며, 형조판서,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官),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특명(特命)으로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 공은 본래부터 선부(選部)17)는 스스로 단념한 터이므로 여러 번 글을 올려 면제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으나 임금께옵서 진지하게 권고하시므로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크고 작음과 급하고 급하지 않음을 가려 적당한 인재를 골라 쓰고 후진들을 장려하며 멀리 있는 사람을 거두어 쓰니 여론이 따라 들어 “평윤(平允)하다”하였다. 이어 어영대장(御營代將)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해년(丁亥年)18) 봄에 왕세자가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자 훈련대장(訓練大將)으로 옮기고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에 제수되었다가 좌부빈객(左副賓客)에 승진되었고, 7월에 원손(元孫)19) 이 탄생하였을 때 산실(産室)에 별입직 하였으므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자되었다.
무자년(戊子年)20)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3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승진되었으며, 이듬해에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경인년(庚寅年)21) 5월에 왕세자가 승하하시자 공이 지극히 애통해하여 기절할 정도였고, 빈궁(殯宮)과 봉묘(封墓) 등의 일을 차마 몸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정을 개진하여 체임하였다. 이해 세손우부빈객(世孫右副賓客)과 책저부사(冊儲副使)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문호묘(文祜廟)가 조영되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자되고, 또 그 이듬해 가을에 왕세손이 개강(開講)하자 문충공(文忠公)이 들어와 글을 가르쳤는데, 공도 또한 간곡히 개도(開導)하였다. 또 그 이듬해 여름에 예조판서가 되어서는 송문정공(宋文正公)을 추배(追配)한 고사를 원용하여 김충문공(金忠文公) 조순(祖淳)을 정조대왕(正祖大王) 묘정(廟廷)에 종향(從享)케 하였다.
갑오년(甲午年)22) 창경궁(昌慶宮)을 개건할 때 보국(輔國)에 승계되고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며, 10월에 창덕궁(昌德宮)이 준공되자 자서(子婿)중의 초사자(初仕者)를 임용토록 한 명령이 있었고, 11월에 순조(純祖)께옵서 승하하시고 헌종(憲宗)께옵서 즉위하시자, 효명세자(孝明世子)를 추존하여 익종(翼宗)으로 삼고, 세자빈은 왕대비(王大妃)로 진호(進號)되었다. 이에 국전(國典)의 준례(準例)에 따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이 상소하여 대행왕묘(大行王廟)23)의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실 것을 주청하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행대왕(大行大王)은 자가(自家)에 검소하시었고 백성을 보기를 조금이라도 손상될까 조심하시었으며,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시지 않고, 화리(貨利)를 불리지 아니 하시어, 예로부터 ‘삼왕(三王)의 성세(盛世)’라 호칭되어 오는 미덕(美德)을 검유하시었나이다. 구라파(歐羅巴)의 사교(邪敎)를 배척하시어 황(潢)과 지(池)와 같이 추악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우리 세신(世臣)들을 모두 보전하여 주시고, 우리 사부(士夫)들이 쫓아야 할 바를 이끄시었으므로, 백성이 복되게 안정되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어, 이로써 천심(天心)을 극향(克享)하고 후손들에게 넉넉한 복(福)을 드리워 억만년의 끝없는 기반을 열어 놓으시었습니다. 이후 사왕(嗣王)50) 께옵서 이러한 광열(光熱)을 발양(發揚)하여 가시는 길은 조속히 불조지의를 거행하여, 이로써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하고 선왕에의 융숭한 예를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같아 곧 성대한 전례(典禮)를 올리니 신인(神人)이 무감(無感)하게 되었다. 그 때 헌종(憲宗)의 춘추 겨우 8세였으므로 순원대비(純元大妃)께서 수렴청정하시게 되었다. 탄생할 때부터 선왕께서는 공에게 세손(世孫) 보양(輔養)의 임무를 맡기시었는데, 이에 이르러 동조(東朝)24)의 명령으로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조석(朝夕)으로 모시고 보호하기를 3년하고서야 비로소 물러나왔다. 그 이듬해에 지실록사(知實錄事)에 차정(差定)되었다. 이하는 공의 관력인데 두세 번씩 제수된 것은 쓰지 않았다.
겸관(兼官) 직함(職銜)으로는 훈련도감종사관(訓鍊都監從事官), 주사호위대장(舟師扈衛大將),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 종묘서제조(宗廟署提調), 선혜청구관당상(宣惠廳句管堂上), 주교사구관당상(舟橋司句管堂上), 경기도구광당상(京畿道句管堂上)이 있고, 길흉(吉凶)간의 도감(都監)으로는 왕세자빈궁입묘도감세조(王世子殯宮入廟都監提調), 왕세손책봉(王世子冊封) 및 책저도감제조(冊儲都監提調), 북사영접도감제조(北使迎接都監提調), 문호묘영건도감제조(文祜廟營都監提調), 경희, 창덕, 창경, 등 삼궐의 중건도감제조(重建都監提調)였으며, 정릉과 장릉을 개사하고, 청계천을 준설하는 역사를 감독하였고, 진작할 때의 악기제조를 감독하였다.
글씨를 쓴 것으로는 영흥(永興)의 성조기적비(聖祖紀蹟碑)25), 인릉(仁陵)26) 표석(表石)의 음기(陰記), 왕세자하현실(王世子下玄室)의 명정(銘旌), 효현왕후(孝顯王后)27)의 가례(嘉禮), 경릉(景陵)28)의 보전(寶篆), 융복전(隆福殿)과 경훈각(景薰閣)의 편액이 있다.
전후 위로로 말을 하사받은 것이 열 번, 표범 가죽을 하사받은 것이 아홉 번, 노비와 전결(田結)을 하사받은 것이 두 번이었다.
신축년(辛丑年)29)에 병사를 지휘하는 관직을 그만 두었는데, 이때로부터 한가로이 살면서 문 밖의 일을 묻지 않았고 때때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부(時賦)를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으니, 시부에 나타난 의상(意象)의 고원(高遠)함이 그를 전공한 사람의 생각으로서도 미칠 바가 아닐 정도였다.
계묘년(癸卯年)30) 10월에 임금께서 천연두를 앓으실 때에 별입직을 하였었는데, 환치되시고 나서 자서제질(子婿弟姪)중에서 초사(初仕)한 자를 임용하시였다. 그 이듬해 겨울 하반(賀班)에 참여하려는데 다리가 갑자기 마비되어 보행에 지장이 생기더니 오래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을사년(乙巳年)31)에 공의 나이 70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었는데, 임금께옵서 궤장(几杖)을 하사하시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주과를 베푸셨다. 이 때 구경(九卿) 이상은 모두 잔치에 나오게 하시고, 잔치에 소요되는 물자를 호조(戶曹)의 낭관(郎官)들로 하여금 수송하여 오게 하시었으며, 이원(梨園)32)의 일등악(一等樂)으로 축하 연주를 하게 하시었다. 또한 임금께옵서 몸소 수서(壽序)를 지으시고 병풍을 써서 하사하시니, 공이 전(箋)을 올려 특별한 대우에 감사드렸다. 임금께서 천연두를 앓으실 때부터 공이 오랫동안 마음을 쓴 까닭에 안질(眼疾)이 생기더니 그 해 겨울에 맏아들이 폭질(暴疾)로 죽자 먼저 간 것을 몹시 슬퍼하다 눈이 더욱 어두워져 앞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 임금께서 때로 혼자 힘으로 기거례(起居禮)를 이수할 때에는 편여(便輿)를 타고 입궐하게 하시였고 대궐 뜰에 닿으면 옆에서 부축하여 대궐에 들이도록 하시였으며 음식과 기거의 범절(凡節)을 매우 은성(殷盛)하게 하도록 하시였다.
병오년(丙午年)33) 여름에 수릉(綏陵)34)을 면봉(緬奉)할 때만 하더라도 오히려 교외에 나가 영공(迎哭)까지 하였는데, 가을과 겨울 사이에 병환이 갑자기 위독하여짐에 대내(大內)에서 문병이 잇따르고 의관(醫官)을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마침내 10월 14일로서 관사(官舍)를 버리게 되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대궐의 뜰에서 거애(擧哀)하시고, 이어 사저(私邸)에 가시어 조문하려 하시었는데, 문충공(文忠公)35)이 차(箚)를 올리어 중지시켰다. 이에 임금께서 교지를 내려 호상(護喪)하게 하시고 동원부기(東園副器)와 비단, 삼베, 무명, 돈, 쌀 등을 하사하시였으며, 그날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하시고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충경(忠敬)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성복(成服)하기에 이르자 몸소 제문(祭文)을 지으시고는 각신(閣臣)을 보내시여 대신 고하게 하고, 발인할 때에는 중귀인(中貴人)36)들을 시켜 호행(護行)케 하시였으며, 어제문(御製文)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시였다. 기년(期年)이 되자 또 이와 같이 하시여 매우 슬퍼하시고 포양(襃揚)하심이 갈수록 지극하시였다.
12월 9일에 춘천부의 북쪽 개양동(開陽洞) 간좌원(艮坐原)에 장사지냈다. 공의 배(配)인 부부인(府夫人)을 처음에는 파주(坡州)의 기곡(基谷)에 장사지냈는데, 이 해 8월에 이곳에 이장하여 묻어 두었다가 공이 돌아가자 부장(祔葬)하였고, 철종(哲宗) 신유년(辛酉年)37) 10월 14일에 이르러 오른쪽 언덕의 경향원(庚向原)에 천봉(遷奉)하였다. 금상(今上) 2년 을축(乙丑)38)에 지사(知事) 김공(金公) 병학(炳學)39) 이 공의 충근(忠勤)과 공적을 열거하여 진술하기를, “순심(純心)과 많은 치적이 있었으니 순조(純祖)의 묘정(廟廷)에 배향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으므로, 임금께옵서 조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문하여 허가하시였으니, 덕을 높이시고 덕에 보담하심이 극진하였다 하겠다.
부인(夫人)은 목사(牧使) 증좌찬성(贈左贊成) 시연(時淵)의 딸인데, 유문(儒門)에서 출생하여 현숙근신(賢淑勤愼)하고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13년 앞선 갑오년(甲午年)40)에 돌아 갔으니 향년 59세였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로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문숙(文肅)44)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병구(秉龜), 병조판서를 지내고 효헌(孝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병기(秉夔)가 있다. 병기는 문충공에게 출후(出後)하였다. 맏따님은 곧 우리의 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이신데, 우리 익종(翼宗)의 배필이 되시여 우리 헌종대왕(憲宗大王)을 낳으시였고, 금상전하(今上殿下)께서 들어가 보위(寶位)를 이어 받으셨는 바, 윤서(倫序)로 따지자면 익종(翼宗)을 아버지로 하고 대비(大妃)를 어머니로 삼은 것이다. 다음은 전(前) 승지(承旨) 이인설(李寅卨)41)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현(現) 판서(判書) 유치선(愈致善)42)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前) 군수(郡守) 김석현(金奭鉉)43)에게 출가하였다. 문숙(文肅)은 종부제(從父弟)45)인 판서 병준(秉駿)의 아들인 성하(成夏)로 후사를 삼았으니, 이는 공의 유지(遺志)이다. 전(前) 부제학(副提學) 효헌(孝獻)의 계자(繼子)는 영하(寧夏)이니, 현재 이조참판을 지내고 있으며, 유치선의 계자는 진학(鎭學)이다.
공은 모난 얼굴과 풍부한 턱에 타고난 성품이 돈후(敦厚)하였으며, 보는 것이 단정하고 나아가고 머무르는 것이 상도(常道)가 있어, 바라보매 엄연한 위엄이 두려워할만하고 기풍과 거동이 가상(可象)하였다. 또 일단(一團)의 화기(和氣)가 얼굴빛에 넘치고 말씨에 나타나 융화스러운 분위기는 봄바람이 좌중에 가득한 것 같았다. 확고하게 자신을 지키고 너그러움으로 남을 대하며 조심성 있게 일을 처리하고 인자하고 은혜롭게 일들을 제도(濟度)하니, 젊어서부터 이미 사우(士友)들에게 중하게 보였고 높은 자리에 오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추복(推服)하여 대인장덕(大人長德)으로 삼았다.
기미년(己未年)46)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했을 때는 조비(祖妣) 홍씨부인(洪氏夫人)의 나이 80여세였다. 효문공(孝文公)47)은 바쁜 정무를 총괄하느라 집에 있을 때가 적었으므로 공이 정성껏 봉양하여 음식과 의복을 적절하게 받들고 집안의 대소사를 짜임새 있게 처리했다. 무진년(戊辰年)48) 여름에 효문공(孝文公)이 돌아가고, 겨울에 조비(祖妣)가 세상을 떠나자 공은 참최복(斬衰服)을 입은 중에 이어 중상(重喪)을 당하였음도 처음부터 끝까지 범절을 정성스럽고 미덥게하여 시종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고로(孤露)하게 되자 두 자씨 섬기기를 어머니 같이하여 모셔다 대접하기를 한 달도 거르지 않았고 모든 일을 자문하여 실행하였다. 돈목(敦睦)에 힘쓰고 남 주기를 좋아하여 친척과 친구 간에 빈궁한 자가 있으면 그 의식(衣食)을 돌보고 혼상(婚喪) 치르는 것에 도움을 주어 그 몰락한 것을 부축하여 주었다. 계사년(癸巳年)49)의 대흉(大凶)을 당해서는 봉급 받은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식량 대주기를 보리가 날 때까지 하였으니,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살아난 자가 몇 집인지를 모를 정도로 많았다. 조정에 서서 벼슬살이를 함에는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고 사무를 처리하되 모두 법규에 따라 하였으며, 탁지(度支), 선혜청(宣惠廳), 삼영(三營)과 제사(諸司)의 직무를 맡았을 때에는 제도를 조절하여 출납을 삼가니 부고(缶鼓)가 모두 가득 찼었고, 공사(工事)를 감독한 때에는 적게 들이고서도 빠르게 이루되 완전하게 하여 치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신이 말하기를, “척신(戚臣)들이 조정 일에 간섭하면 안 된다”라고 하여, 나아가고 물러남과 옳고 옳지 않음을 일체 참견하지 않고 40여 년 동안 세심하게 마음 쓰고 근약(謹約)하면서 오직 임금을 보호하고 성학(聖學)을 힘써 면려하는 것으로만 분내(分內)의 직임으로 삼았으니, 그 밝디밝은 단충(丹衷)은 천지신명에게 대질(對質)할만 하였다.
헌종대왕께옵서 지은 제문에 “인사전형(人事銓衡)의 길을 넓히고 국사(國使)를 계획하면서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재정을 관할하였으니, 그 공적이 적지 않았으나 공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에 불과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헌종대왕께옵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공이 나를 계도하기를 한결 같이 정성으로 하였고, 공이 나를 보필하기를 진실로 정직하게 하였으니, 청사(靑史)에 빛나고 금석(金石)에 새길 만하도다. 내가 어찌 공을 사사로운 마음으로 추켜세우겠는가? 심신을 다하여 직임을 다하였기 때문이로다. 오늘날에 이만큼 성취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라고 하시였으니, 후세에 이 성유(聖諭)를 읽어 본다면, 공의 평생의 일과 공적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며, 반드시 당시 군신(君臣)이 서로 잘 만났던 것에 감읍하게 될 것이다. 아래와 같이 명(銘)을 짓노라.
공경심 지극한 순조대왕께옵서는, 역대 선왕의 공업(功業)을 빛내셨는데, 그 어떤 신하가 보필하던가? 조충경공(趙忠敬公) 그분이었네. 아름답도다! 충경공이여, 별과 산악의 정기를 타고 났으니, 다만 그 서있는 바가 좋아서 만이 아니라, 사람이 훌륭하고 높으셔서 그러하였네. 훌륭한 부인과 배필이 되어, 쌓인 경사가 상서로움을 발하였느니, 문모(文母)와 같은 훌륭한 후비(后妃)를 낳아, 은밀한 덕화가 널리 드러났네. 지난 일을 살펴 보건데, 순조대왕과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께옵서는, 나라의 큰 일을 부탁하셨으니, 공(公)을 중후하게 알아주었다고 할 만하네. 말씀하시기를 “우리 어린 손자가 앞으로 성취함은 경(卿)에 있노라“라고 하시자, 공이 머리를 조아려 대답하기를, “온갖 정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였네. 외척(外戚)의 높으신 어른으로서, 사왕(嗣王)을 지성으로 보좌하는 것을, 주(周)나라가 건국될 때의 태사(太師) 상문(尙文)51)과 같이 하였네. 스승 노릇하며 보호하여, 가르치고 또 보살폈으니, 끊임없는 명예와 칭송이 있음은, 내가 할 일을 솔선해서 하였기 때문이네. 무거운 부탁을 잘 이룬 것은, 밝으신 명령에 말미암은 것이었고, 종묘에서 연주하는 아악은, 역대 조성(祖聖)의 위열(偉烈)을 기림이로다. 좌우로 양양하고 엄숙한 제향(祭享)은, 덕업(德業)을 같이한 원신(元臣)이러니, 천만년 영구히 가도록, 종향(從享)되어 제사를 받을지니, 그와 행적은 처음과 끝이 있었고, 장수한데다 지위도 높았으니, 공덕을 기록하고 충성을 밝히는, 나의 명시(銘詩)가 부끄러움이 없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무진(戊辰)52) 월 일에 세우다
1) 무신년(戊申年): 헌종 14년, 즉 1848년.
2) 정묘년(丁卯年): 고종 4년, 즉 1867년.
3) 성하(成夏): 1845~1881. 자는 순소(순소), 호는 소하(소하)
4) 영하(寧夏): 1845~1884.
5) 흥근(興根): 1796~1870.
6) 상경(尙絅): 1681~1746.
7) 신축년(辛丑年): 경종 원년, 즉 1721년.
8) 건저(建儲): 왕세자 책봉 문제를 말한다.
9) 병인년(丙寅年): 고종 3년, 즉 1866년.
10) 엄(曮): 1719~1777.
11) 영선록(瀛選錄: <영선고(瀛選考)>라고도 한다. 홍문관 관원으로 선발될 후보자의 추천명단. 책자의 이름을 ‘영선록’이라한 것은 홍문관의 별칭이 ‘영선’이기 때문이다.
12) 동학교수(東學敎授): 동학은 서울안의 양반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학교. 명칭을 동학이라 한 것은 이것이 서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교수는 종 6품직.
13) 기묘년(己卯年): 순조 19년, 즉 1819년.
14) 전조(銓曹): 이조(吏曹)를 말한다. 이조를 전조라 한 것은 이조의 역할중의 하나가 인물의 전형(銓衡)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5) 신사년(辛巳年): 순조 21년, 즉 1821년.
16) 을유년(乙酉年): 순조 25년, 즉 1825년.
17) 선부(選部): 이조(吏曹)를 말한다. 이조의 직무중의 하나가 인사(人事)이므로, 선부라고 별칭한다.
18) 정해년(丁亥年): 순조 27년, 즉 1827년.
19) 원손(元孫): 헌종을 말한다.
20) 무자년(戊子年): 순조 28년, 즉 1828년.
21) 경인년(庚寅年): 순조 30년, 즉 1830년.
22) 갑오년(甲午年): 순조 34년, 즉 1834년.
23) 대행왕묘(大行王廟): 돌아간 순조묘를 말한다.
24) 동조(東朝): 순원대비를 말한다.
25) 성조기적비(聖祖紀蹟碑):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선대가 이곳에 터를 닦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이러한 기적비를 세우게 되었다.
26) 인릉(仁陵): 순조의 능을 말한다.
27) 효현왕후(孝顯王后): 헌종의 비(妃)를 말한다.
28) 경릉(景陵): 헌종의 능을 말한다.
29) 신축년(辛丑年): 헌종 7년, 즉 1841년.
30) 계묘년(癸卯年): 헌종 9년, 즉 1843년.
31) 을사년(乙巳年): 헌종 11년, 즉 1845년.
32) 이원(梨園):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은 장악원(掌樂院)의 별칭.
33) 병오년(丙午年): 헌종 12년, 즉 1846년.
34) 수릉(綏陵): 익종(翼宗)의 능을 말한다.
35) 문충공(文忠公): 조만영의 아우 조인영을 말한다.
36) 중귀인(中貴人): 궁중의 내시(內侍)를 말한다.
37) 신유년(辛酉年): 철종 12년, 즉 1861년.
38) 을축(乙丑): 고종 2년, 즉 1865년.
39) 병학(炳學): 1821~1879. 본관은 안동,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로, 이조판서 수근(洙根)의 아들이다. 철종 4년(1853) 현감으로 정시무노가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40) 갑오년(甲午年): 순조 34년, 즉 1865년.
41) 이인설(李寅卨): 본관은 전주이고, 판서를 지냈다. 우의정 지연(止淵, 1777~1841)의 아들이다.
42) 유치선(愈致善): 1813~?.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경(子慶)으로, 인환(仁煥)의 아들이다. 순조 31년(183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판관(判官)의 직에 있다가, 헌종 10년(184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이 판서(判書)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43) 김석현(金奭鉉): 본관은 광산(光山), 판관(判官) 재후(在厚)의 아들이고, 영의정 상복(相福)의 증손자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다.
44) 문숙(文肅): 조병구(趙秉龜)를 말한다.
45) 종부제(從父弟): 4촌 동생.
46) 기미년(己未年): 정조 23년, 즉 1799년.
47) 효문공(孝文公): 조진관(趙鎭寬)을 말한다.
48) 무진년(戊辰年): 순조 8년, 즉 1808년.
49) 계사년(癸巳年): 순조 33년, 즉 1833년.
50) 사왕(嗣王): 헌종을 말한다.
51) 상문(尙文): 강태공(姜太公)을 말한다. 위수(渭水)가에서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주무왕(周武王)에게 등용되어, 주나라 건국에 큰 기여를 하였다. 주나라 초기의 전장제도(典章制度)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52) 무진(戊辰): 1868년.
◆ 원문
有名朝鮮 領敦寧府事 豐恩府院君 贈議政府領議政 諡忠敬趙公石厓 神道碑銘
有明朝鮮領敦金府事豊恩府院君贈議政府領議政諡忠敬趙公石厓神道碑銘
有明朝鮮 輔國崇綠大夫 領敦寧府事 兼 吏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世子左副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豊恩府院君 贈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諡忠敬 趙公 神道碑銘 竝書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原任奎章閣提學 致仕奉朝賀 安東 金興根 撰 甥姪 崇綠大夫 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弘文館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經筵日講官 侍講院左賓客 金世均 謹書
國舅石厓公 旣葬之三年 戊申, 憲宗大王 書下朝鮮領敦寧府事 豊恩府院君 贈議政府領議政 諡忠敬趙公萬永之墓. 配贈德安府夫人 恩津宋氏 祔左. 四十一字 命刻而表之. 弟文忠公寅永 記其陰, 越二十年 丁卯, 孫成夏 將樹神道之碑, 寧夏 持大冢宰洪公在喆所爲狀, 屬銘於興根. 惟余受知於公, 覿公者久, 慕公者深, 其可以老病無文辭, 乃次第歷官行事, 謹述公所以勤勞王家, 聖朝所以崇報功宗者, 書之于石. 公字胤卿, 石厓 其號也. 系出豊壤, 祖高麗開國功臣 諱孟, 入本朝 珪組相繼, 代有進德. 曾祖諱尙絅, 行吏曹判書 贈領議政, 諱景獻 辛丑 建儲密贊大策. 今上 丙寅, 命世祀以酬忠勳. 祖諱曮, 吏曹判書 贈左贊成 諡文翼, 秉直道, 忤權凶, 流竄以卒. 考諱鎭寬, 行判敦寧府事, 兼吏曹判書 贈領議政 諡孝文, 積誠十九年, 伸白父寃, 正廟稱孝子. 妣贈貞敬夫人 南陽洪氏, 府使贈吏曹參判益彬女. 公以英宗五十二年 丙申 五月五日生. 中純祖元年辛酉進士試. 癸酉春 拜顯隆園參奉, 冬擢增廣文科. 明年 陞六品, 除宗簿寺主簿 兵曹左郞文臣 兼 宣傳官 司諫院正言 侍講院司書. 後於諫院則陞獻納司諫, 講院則歷兼司書 兼文學弼善 兼弼善 至兼輔德. 又明年 入弘文館爲副修撰. 時有投匭言瀛錄不協, 公以雖非著己, 人言不可不引. 校理副校理修撰應敎副應敎 誥命過十度, 而一不膺. 冬以暗行御史 按廉湖南, 七閱朔而至翌夏竣事, 黜貧殘, 剔耗蠹, 發潛善, 申積枉, 南民到于今稱之 明年 拜東學敎授 司憲府掌令. 又明年 拜掌樂院司僕寺正, 瀋陽使書狀官, 專理行事, 風裁整勅. 己卯秋 今大王大妃膺世子嬪三揀, 陞通政大夫 承政院同副承旨, 遞爲禮曹參議, 嘉禮成 除右副承旨. 明季 拜分兵曹參議 敦寧府都正, 秋命授吏曹參議, 公以所處不宜, 冒銓任 力辭之, 除刑曹參議 成均館大司成. 辛巳 正月 上以公地望, 可托干城, 擢拜嘉善大夫 禁衛大將. 公悚然曰 與衆平進, 庶或寡過. 且書生何以將兵, 陳懇不許, 連除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 春秋館 經筵事. 明年 拜刑曹參判, 十月 世子嬪紅疹 別入直. 十二月 王世子紅疹 又別入直, 加嘉義. 乙酉 除同知成均館事 都摠府副總管 道承旨 拜吏曹參判, 又辭而不居, 移戶曹. 十月 有旨進秩資憲大夫, 拜刑曹判書 都摠管 知經筵, 旋判禮曹. 明年 特除吏曹判書 兼知春秋. 公於先部素自劃, 屢陳章 乞免. 上敦迫隆摯, 黽勉肅命, 大小閑劇, 擧當其材, 獎勵後進, 收拾遠人, 物論洽然謂平允. 拜御營大將 知中樞府事. 丁亥春 王世子代理庶政, 遷訓練大將 除世子右副賓客 陞左副. 七月 元孫誕生, 産室別入直 陞正憲. 戊子 拜判尹, 三月 陞崇綠大夫 判義禁府 敦寧府事. 明年 拜戶曹判書. 庚寅 五月, 王世子賓天. 公痛殞欲絶, 嬪宮封墓, 不忍躬親其事. □□□辭 兼 世孫右副賓客 冊儲副使. 明年 文祐廟營建, 加崇綠. 又明季秋 王世孫開講, 文忠公入內授書. 公亦□□□導. 又明年夏 典秋宗援, 宋文正追配故事 奏以忠文金公祖淳 從享于正宗大王. 甲午昌 □□改建 進輔國階, 拜判中樞府事. 十月彰德宮訖役 命子堶中 初仕調用. 十日月 純祖禮□, 憲宗卽祚, 追尊孝明世子爲翼宗. 世子嬪進號□□大妃 公以國典例, 授寧敦寧府事 封豊恩府院君. 公上疏請大行王廟 預定世室, 其略曰: 洪維我大行大王, 克類, 全保我世臣 導率我士, 趨兆庶□ 定□□寧用能克享天心, 垂裕後昆. 誕啓萬億年無疆之基. □今後嗣王覲光陽烈之道, 其在於亟擧 不□之儀 干□□ 先王之美 效先王之 □□□□□議 僉同戴戴盛典神人無憾. 時憲宗寶齡 僅八歲, 純元大妃垂簾 同聽政, 自□□之初 先王任公輔養 至是 東□□□ 處禁中朝 □□□□ 三年 而始退 明季 差知實錄事, 此公歷官也. 再三授者不書. 兼銜 則訓練都監 從事□□師 護衛大將 觀象監□□□ 內醫 □□□ 樂三院 司僕軍□□寺 宗廟署 □□ 宣惠廳 舟橋司 京畿勾管堂上 吉凶都□ 則提調 王世子嬪宮入廟 王世孫冊封 冊□□ 使迫接文祜廟營建 慶福昌德昌慶三闕 □□□□ 董貞陵章陵改莎 與濬川之役, 監造進爵. 時樂器書寫 則永興聖祖記績碑 仁陵表石隆記王世子下□堂 □□□□□□□禮□□□□ 寶養隆福殿 景黃閣扁額, 前後以勞錫馬者十, 鷄文皮者九, 給奴婢田結者二. 辛丑 解兵柄, 自是 閑居不問戶外事. 時與命 □□□□□□□□□□□□□□ 調者 思議所及. 癸卯 十月 上有痘候, 別入直. 旣平復, 命子壻弟姪中 初仕調用. 明年冬 赴賀班 脚忽痿痺 愆於步, 久而未效. 乙巳 公壽躋七十八耆社, 上特賜几杖, 遣承旨宣醞 九卿以上 皆赴宴, 宴需令戶部郞 輸送以梨圖一等樂侑之, 親製壽序, 手書屛風以賜之. 公進箋謝異數, 自聖痘時, 公積久勞心, 已有眼眚. 至冬 長子以暴疾卒, 慟切逆理益昏, 醫殆不能辨物, 時或自力修起居禮, 命以便輿至陛, 扶而上殿詢寢, 啖節甚殷. 丙午夏 綒陵緬奉, 尙能迎哭於郊坰. 秋冬之交 疾劇沈綿, 自大內勞問相續, 日遣太醫診視, 竟以十月十四日捐館舍. 訃聞 上震悼, 擧哀于闕庭, 將臨弔于私第, 文忠公上箚得寢 下敎庀喪 賜東園 副器綿緞麻錦布錢米, 卽日 贈議政府領議政. 不待狀 賜諡忠敬, 至誠服 親綴文 遣閣臣替告之, 及靷 使中貴人護行 御製文以酹之. 及期 又如之. 所以痛□ 而揄揚之者, 愈往愈至. 十二月 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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